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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경향신문 입사기

나의 경향신문 입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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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류전형 마감 전날, 행여나 오탈자가 있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자기소개서를 꼼꼼히 확인했습니다. 어색한 문장을 붙들고 이리저리 바꿔봤습니다. 수정을 마치고 시계를 보니 날이 바뀌어 새벽 3시였습니다. 머리가 후끈했습니다. 뻑뻑한 눈을 비비면서 ‘이만하면 괜찮은 것 같은데’라며 자신을 다독였습니다.

처음에는 3000자 분량의 백지를 어떻게 채워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억지로 경험을 쥐어짜 쓰려고 하니 글이 중구난방으로 흩어졌습니다. 결국 나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경험에 집중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기자가 되기로 결심한 극적인 계기나, 내세울 만한 뚜렷한 사명감은 없었습니다. 대신 ‘뭔가를 쓰는 직업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은 선명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글’과 관련된 경험을 찾아 엮어나갔습니다. 추상적인 말이 아니라 구체적인 경험을 녹여내려고 했습니다. 초등학생 때 읽었던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와 대학생 때 읽은 김훈의 ‘자전거 여행’에 대해 썼습니다. 지역에서 생활하며 바라본 5일장 풍경과 아이들이 개울가에 물장구치는 모습을 자기소개서에 담았습니다. 과장하지 않고 솔직담백하게 쓰려고 했습니다.

필기시험은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마음가짐으로 준비했습니다. 낯선 논제를 100분 남짓한 시간 동안 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습니다. 논술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어놓기로 했습니다. 평소 스터디를 하면서 매주 두 편의 글을 쌓아나갔습니다. 글이 20편 정도 쌓이자 자신감이 붙었습니다. 시험장에서는 ‘일론 머스크의 트위터 인수와 미디어 자본’ ‘너에게 가는 속도 493km 표기의 적절성’ 두 논제가 나왔습니다. 생소한 논제였던 터라 처음에는 당황했습니다. 지금까지 써왔던 글 3~4개에서 논리와 사례를 뽑아내고 즉석에서 떠올린 생각을 버무려 글을 완성했습니다. 데이터베이스의 역할이 절대적이었습니다.

실무전형에 포함된 르포 기사작성은 불확실성이 높은 관문이었습니다. 어떤 주제가 나올지 예측도 어렵고, 방향을 잡아도 취재가 잘 되리란 보장이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나온 소재를 쭉 훑어봤습니다. 같이 시험을 준비한 동료에게 조언을 구한 것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시험장에서는 ‘코로나19 이후의 일상’이라는 주제가 나왔습니다. 코로나로 노인정이 제대로 운영되지 않고 있다는 내용을 썼습니다. 취재원의 의심스러운 눈초리에 굴하지 않고 용감하게 말을 걸다보니 쓸 수 있는 멘트들이 조금씩 모였습니다. 정해진 취재 마감 시간보다 30분쯤 미리 들어와서 취재 내용을 정리한 것이 유효했습니다.

면접 때는 ‘긍정적 자기암시’가 효과적이었습니다. 7~8명의 면접위원이 내 답변을 평가한다고 생각하면 어깨가 무거워졌습니다. 주눅 든 모습으로는 좋은 인상을 주기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평소 긴장을 많이 하는 터라 대책이 필요했습니다. 틈틈이 ‘면접은 나에 대해 궁금한 게 많은 사람들에게 나를 알려주는 자리’라고 자기암시를 걸었습니다. 좋은 인상을 줬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은 한결 편했습니다. 실무전형을 마치고 나서는 기분이 좋았습니다. 입사한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기도 했습니다.

최종면접에서 부풀었던 기대가 가라앉았습니다. 자기소개서에 적은 사실관계를 지적받았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머뭇거리다 엉뚱한 답변을 내놓았습니다. 면접을 마치고 왜 그렇게밖에 답변하지 못했을까 속이 상해 지인을 붙잡고 하소연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어떤 점 덕분에 합격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자기소개서가 일정 부분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봅니다. 논술, 르포 기사는 ‘나’에 관한 글은 아닙니다. 자기소개서는 내가 누구인지 알려줄 수 있습니다. 자기소개서 말미에 “경향신문에서 더 넓은 현장을 누비며 타인에게 뻗어 나가는 글을 쓰기를 희망한다”고 적었습니다. 이 말을 지키고 있는지 되돌아보면 좀 민망하기는 하지만 당시에는 제 나름대로 솔직한 심정을 적었습니다. 지원자분들도 자기소개서를 ‘나’를 주제로 한 글쓰기 시험이라고 생각하고 삶의 경험을 솔직하게 풀어내신다면 좋은 결과 얻으실 거라 믿습니다.
정해진 준비 방법이 없어서 참 어려웠습니다. ‘붙을까?’ 싶으면 떨어지고 ‘떨어지겠다’ 했는데 붙기도 했습니다. 정말 다행히도 경향신문이 후자였습니다. 제 이야기는 그냥 어떤 이는 이렇게 준비했다더라 정도로만 참고해주세요.

서류에선 기자 직무 역량을 어떻게 보여줄지 막막했습니다. 학창 시절 기자가 꿈이라고 얘기했고 대학방송국에도 몸 담았지만 그뿐이었습니다. 공모전 참여 경험이나 인턴기자 경험이 없어서 제대로 된 기사를 써본 일이 없었습니다.

갖고 있지 않은 실전 경험 대신 실무 경험이라고 여겨질 만한 다른 것들을 내세웠습니다. 기자는 결국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보고 듣는 게 일 아닐까요. 그래서 세상에 넓은 관심 두고 살아왔다는 걸 보여줄 수 있는 내용으로 3000자를 채웠습니다. 예컨대 ‘교환학생 시절 버스 창밖으로 인종차별을 목격했다. 이걸 계기로 도시 기저에 어떤 차별이 있단 걸 배웠다’ 하는 식이었습니다. 관찰만 했을 뿐 기사를 썼던 건 아닙니다. 다만 그러한 관찰 경험이 기자로 일하는 데 밑거름이 되지 않겠냐는 생각이었습니다. 성과가 아닌 경험도 충분히 자신의 역량과 관심사를 소개하는 데 쓰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언론사 필기 시험의 첫 합격을 맛보기까지 짧지 않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합격 전과 후를 가른 가장 큰 차이는 ‘논술 개요를 열심히 짰는가’였습니다. 개요 없이 글을 쓰면 1500자 글이 용두사미로 끝나버리거나 처음에 쓰려던 것과 결론이 달라지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경향신문 논술 시험에서도 20분은 개요 짜는 데 할애했습니다. 논제가 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내가 하려는 답은 무엇인지, 답 안에 논제가 요구하는 모든 요소가 다 포함돼있는지 정리한 뒤에서야 원고지에 쓰기 시작했습니다. 종이를 받자마자 글을 쓰기 시작하는 주변 소리에 조급해지는 마음을 다잡아야 했습니다.

개요는 실무 시험에서도 큰 도움이 됐습니다. 르포 기사 작성 시 주제를 받자마자 현장으로 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또다시 조급해지곤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 불안을 이겨내고 고사장에서 어느 정도 주제를 잡고 나가는 게 길바닥에서 덜 헤매는 지름길이었습니다.

지난해 경향신문 실무 시험 르포 주제는 ‘코로나19 시대상’이었습니다. 전년도와 같은 주제가 나올 줄 몰랐던 탓에 크게 당황했습니다. 개요를 짜고 나가긴 했지만 기사 방향을 잡기가 쉽진 않았습니다. 큰일 날 뻔 한 이야기인데, 솔직히 중간에 포기할까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어찌어찌 완성은 해서 냈습니다. 하려는 말은 아무리 못 쓴 것 같더라도 완성은 해야 한다는 겁니다. 사람 일이 어찌 될지 정말 모릅니다.

실무면접과 최종면접 모두 서류를 기반으로 진행됐습니다. 얼마나 진정성 있게 기자가 되고자 하는지를 드러내는 것이 핵심이라고 느꼈습니다. 가장 답하기 어려웠고, 기억에 남는 질문은 “기자가 사회적으로 ‘기레기’라고 욕먹는 시대에 왜 기자가 되고자 하는가”였습니다. 면접 뿐 아니라 면접 그 이후를 위해서라도 진솔하게 고민해야 하는 질문 같습니다. 이제 막 현장을 다니고 있는 요즘. 위 질문에 다시 답해야 한다면 어떻게 말할까 상상해봅니다. 몇 안 되지만 기사를 쓰며 1년 전 제가 했던 답에 확신을 더할 수 있을 때 큰 보람을 느낍니다.

시험을 준비할 땐 저의 부족한 점만 부각돼 보였습니다.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에 자신감이 한없이 떨어질 때가 많았습니다. 그럴수록 필요했던 게 내 강점을 스스로 믿어주는 것이었습니다. 내게 없는 것으로 막막해하기 보다 내가 잘하는 부분에 집중하며 자신감을 채워나가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할 것 같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마음 건강 챙기며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기자를 준비하면서도 편집기자가 뭔지, 무슨 일을 하는지는 잘 모르는 사람이 많은 걸 알고 있습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편집기자를 소개하는 가장 흔한 표현은 ‘최초의 독자이자 최후의 기자’입니다. 기사에 제목을 붙이고, 내용을 잘라내고, 사진을 고르고, 지면 레이아웃을 짜는 일을 합니다. 경향신문 공고가 나던 날, 저는 다른 언론사에서 인턴 편집기자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1년 정도 취재기자로 시험을 보러 다니던 중, 그냥 재미있어 보인다는 이유로 지원했었죠. 그렇게 보낸 반년은 편집을 사랑하게 되기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원고지 십수 매의 기사를 한 단어에 온전히 실어내기 위해 수없이 표현을 정제하고 응축하는 과정도, 매일매일 칼날 끝을 걷는 것 같은 강판 시간도 마냥 좋았습니다.

코로나19 거리 두기가 엄격하던 시절 수험 생활을 시작하고 끝냈습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무던한 성격의 소유자인데도 스트레스성 이명이 생기고 무기력해지더군요. 그럴 땐 ‘언젠가 되겠지’라는 다소 나이브한 생각으로 되도록 스스로를 다그치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아요. 논작은 1년 반 동안 스터디로만 대비했습니다. 전문적인 조언을 못 받는 대신 충분히 써보자는 생각으로 수요일과 토요일마다 논술과 작문을 각각 하나씩 쓰고 다음 날 퇴고하는 스터디 모임을 운영했어요.

고민 없이 편집기자로 지원한 만큼 자기소개서와 필기시험에서 가장 공들인 것은 제목이었습니다. ‘나 같아도 궁금해서 한 번 더 보겠다’ 싶게 쓰겠다는 마음가짐이었다고 기억해요. 실무 시험 주제는 ‘코로나19로 변화한 사회상’이었습니다. 현금이 사라지고 비대면 거래가 늘어나서 어르신들이 불편을 겪는단 걸 주제로 삼았습니다. 베테랑 언시생처럼 평소 구상하던 기사를 쓴 건 아니었어요. 평일 낮 시간에 은행, 시장, 버스, 약국, 음식점들을 돌아다니다 보니 어르신들 얘기를 많이 듣게 돼 야마로 삼았습니다. 사진도 직접 세 장을 찍어 첨부해야 했는데, 약국 앞에서 현금을 손에 쥐고 기다리는 할머니 모습이 마침 휴대폰 카메라 앵글에 걸려주어 고마웠습니다.

실무면접은 주로 편집에 가진 애정을 증명하는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좋았던 제목과 뿌듯했던 순간들, 어떤 점 때문에 편집기자가 되고 싶다고 느꼈는지를 얘기했어요. 마지막으로 하고싶은 말로는 ‘경향은 왜 7단 편집을 고수하는지, 6단 면과 7단 면을 나눈 기준은 무엇인지’를 역으로 질문했습니다. 편집기자는 주로 경력직으로 충원돼서 면접을 보는 것도 쉽게 오는 기회가 아니란 걸 알았기 때문에 떨어지더라도 궁금증은 풀고 가자고 생각했어요. 최종 면접에서도 특별히 경향이어야만 하는 이유를 강조하지는 않았습니다. 막연히 일하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은 많았지만, 다른 많은 지원자들처럼 경향을 읽으며 꿈을 키웠다거나 재수도 불사할 정도는 아니었거든요. 거짓말을 하면 티가 나는 성격이라 되도록 솔직하게 답변했습니다.

덤덤한 척 채용 과정을 돌아봤지만, 사실은 실수투성이에 엉망진창이었습니다. 최종까지 가본 적도 많지 않고 인턴과 병행하는 건 처음이어서 모든 걸음이 첫걸음 같았어요. 지원서에는 경력란을 빠트렸고, 필기는 복기도 못 할 만큼 급하게 쓴 데다가 실무 시험 날에는 지각까지 했습니다. 시험 도중엔 시장에서 지갑을 잃어버려 면접비를 차비로 탕진하기도 했어요. 최종 면접 이틀 전에는 전국 편집기자 체육대회에 억지로 끌려 나가서 경향 깃발을 든 선배들을 먼발치에서 보며 떨었던 기억도 납니다. 그날 얻은 근육통으로 며칠을 끙끙 앓다가 면접이 끝난 뒤에야 근처 카페에서 기절하듯 잠들었더랬죠. 합격운이 꼭 모든 조건이 완벽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찾아오는 건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습니다.

1년은 경향신문을 제 마음대로 해석하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지만 한 가지는 확실한 것 같아요. ‘경향은 이런 사람을 원할 것이다’를 추측해서 그 이미지에 맞게 본인을 끼워 맞춰 포장하거나, 전형적인 기자다움을 강조하려고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 ‘사람이 이렇게까지 다를 수 있구나’ 싶은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그럼에도 큰 틀에서 공통점이 있다면, 경향은 ‘모두 좋은 사람들 뿐이니, 어쩌면 나도 이들만큼 좋은 사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곳입니다. 제 착각을 공고히 해줄 또 한 명의 ‘좋은 사람’으로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2021년 2월, ‘경향신문사 57기 수습기자 모집’ 공고가 뜬 날을 기억합니다. 인턴을 하던 회사로 출근하는 버스 안이었습니다. ‘왜 하필 지금일까’. 탄식했습니다. 선망하던 회사였습니다. 두려웠습니다. 학교 수료를 앞두고 지원하는 첫 언론사 입사 시험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의 경향신문 입사기’를 쓰기에 정말 적합하지 않은 사례입니다. 제 짧은 경험보다 이 글을 읽으실 분들의 경험이 더 길고 깊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누군가에게 ‘이런 사람도 붙을 수 있구나’하는 작은 자신감을 더해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여기고 조심스레 써보겠습니다.

제가 시험공부를 한 만큼 준비하지 않은 언시생도 흔치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경향신문을 1년간 꾸준히 읽었습니다. 그동안 매주 논술, 작문 글을 썼습니다. 시험을 앞두고는 상식 책도 봤습니다. 준비했던 것은 딱 여기까지였습니다. 필기도 붙어본 적 없었는데 이후 시험까지 준비했을 리 만무합니다. 첫 지원이니 어쩌면 당연했습니다.

입사 과정을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우당탕탕’이었습니다. 서류 마감 전날, 밤새 자소서를 쓰고도 완성하지 못해 다음 날 오후까지 썼습니다. 서류 제출 마감 2시간 전, 입사 사진을 찍었습니다. 면접에 갈 때는 번듯한 정장 한 벌 갖춰두지 않아 룸메이트의 옷을 빌려 입었습니다. 실무 시험은 ‘코로나19 시대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에 대한 기사 작성을 요구했습니다. 입사 이후 면접관이셨던 선배는 “당연히 준비했을 주제 아니었냐”고 했습니다. 준비한 기사는 없었습니다. 실무 면접은 자기소개서에 대한 질문, 실무 기사에 대한 질문만 준비해 갔습니다. 실무 면접에서 자기소개서, 실무 기사와 관련한 질문은 단 한 문항도 없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매 순간이 위기였습니다.

위기의 순간에서 찾았던 건 결국 작은 경험들이었습니다. “자기소개를 해봐라”라는 질문에 반지하 같은 기자가 되겠다고 답했습니다. 반지하 자취방에 살던 지난 2020년, 지겹게도 비가 왔습니다. 세차게 비가 내리던 날, 화장실에서 괴상한 소리가 났습니다. 하수도를 타고 물이 꼬록꼬록 내려가는 소리였습니다. 열린 창문을 통해서는 후두두둑 떨어지는 빗소리가 들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반지하는 저에게 ‘지상과 지하의 소리를 모두 들을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사회 주류와 소수자의 시선을 고루 갖출 수 있는 기자가 ‘반지하 같은 기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주민방송에서 2년, 맥도날드 알바로 3년을 일했습니다. 작은 영화제에 이주민을 주제로 출품을 한 적도 있고, 방송국에서 영상 인턴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많은 지원자가 실무 시험 기사를 작성할 때 르포 기사를 쓴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코로나19 시대상’을 보여줄 르포 기사를 쓸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일 자신 있던 ‘이주민 차별’을 취재했습니다. 이주 노동자에게만 코로나19 진단 검사를 의무화하던 때였습니다. 기획안 시험에서는 평소 즐겨보던 채널과 공모전에 냈던 아이디어를 섞었습니다. 최종 면접에서는 ‘색깔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보라색을 설명한다면?’이란 질문을 받았습니다. 잠시 고민했습니다. 이내 즐겨 듣던 노래가 떠올랐습니다. 아이유의 ‘라일락’을 들려주겠다 답했습니다.

‘삶이 개념을 만든다’는 말을 좋아합니다. 서류 접수에서부터 최종 면접까지, 손쉬운 단계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실무 시험을 앞두고는 문득 이 과정이 버거웠는지, 집에 돌아가는 길에 골목식당 영상을 보며 갑자기 눈물을 쏟은 적도 있습니다. 분명히 길고, 힘든 시험 과정입니다. 하지만 준비되지 않았던 스스로의 입사 과정을 돌이켜보면, 경험에 집착했던 것이 운과 맞닿아 일어난 기적이었다고 느낍니다. 그 과정에서 지원자분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지원자만의 개념이 무엇인지를 자신 있게 풀어내 주신다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마침내 회사에서 만나 여러분과 삶의 개념을 나눌 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경향신문 입사 직전 다른 언론사의 최종 면접을 봤습니다. “기자를 꿈꾸게 된 계기가 뭐냐”는 원론적인 질문을 받았어요. 당연히 예상 질문 리스트에 있었고, 준비한 대답을 했죠. 그런데 “그런 건 계기가 아니다. 어린 시절에 있었던 계기를 묻는 거다”라며 면박을 주더군요.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에 기자를 꿈꾼 적이 없거든요. 하지만 그렇게 대답할 순 없으니 급하게 그럴듯한 이야기를 지어냈습니다. 그리고 떨어졌습니다. 덕분에 지금 경향신문 입사기를 쓰고 있으니, 다행인 일이죠.

목적도 대책도 없는 20대 초반을 보냈습니다. 당시 스스로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실은 “나는 글쓰기가 좋다!” 딱 하나뿐이었어요. 그러다 목적과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에 이르러 ‘존박의 뮤직하이’(지금은 DJ가 딘딘으로 바뀌었군요)와 같은 라디오 음악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이 돼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글쓰기와 음악만 좋아하면 할 수 있는 일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웬걸, 라디오 프로그램에는 ‘뮤직하이’와 ‘볼륨을 높여요’뿐 아니라 ‘시선집중’, ‘뉴스하이킥’ 같은 시사 프로그램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부터 신문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시사에 대한 배경지식이 0에 수렴했기 때문에 하루 네 시간씩 경향신문을 정독했습니다. 맛보기 스푼으로 여러 신문을 찍어 먹어 보고는 제가 최종적으로 ‘선택’한 신문이었죠.

충동과 치기에서 비롯한 꿈은 여러 번 바뀌었습니다. ‘뮤직뱅크’나 ‘엠 카운트다운’을 만들고 싶어 예능PD로 방향을 틀고는 일 년 반 동안 예능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제가 보고 듣는 모든 것들을 예능 프로그램으로 기획하기 시작했습니다. 번번이 물을 먹으며 인상적인 피드백들을 들었어요. 한 친구는 제게 “너는 예능을 하기에는 너무 반기업적이다”라고 조언했고, 기획안 스터디에서는 “그런 진지한 이야기를 누가 재미있게 볼 수 있겠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죠.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동안에도 ‘경향신문 정독’은 제 일상에서 상수로 고정돼 있었습니다. 그래서 “경향신문이 내 사상을 만들었다”라는 농담 섞인 진담을 하곤 합니다. 이러한 일상이 2년 정도 쌓인 어느 날 “경향신문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습니다. 제가 쓰고 싶은 이야기는 예능국이 아니라 경향신문에 있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첫 기자 시험을 경향신문에서 도전했습니다. 물론 떨어졌어요. 당시 저는 기자가 무슨 일을 하는지, 기자에는 어떤 소양이 필요한지에 대한 상식조차 없었으니까요.

경향신문에서 첫 탈락을 겪고 다시 경향신문에 합격하기까지 딱 일 년이 걸렸습니다. 그사이 새로운 스펙을 엄청나게 쌓은 건 아니에요. 이미 제 인생사에 적립된 이야기들을 ‘기자’의 관점에서 재구성하는 시간이었달까요. 저는 대학 때 학내 언론사에서 활동한 경험도 없고, 외국어 실력도 출중하지 못한 데다가 대외활동 경험도 전무합니다. 경향신문 첫 시험에서 탈락한 후에야 뒤늦게 한 언론사에서 6개월 동안 기자 인턴을 했죠.

인턴 생활과 일 년간의 무수한 탈락 경험이 합격의 자양분이 되긴 했지만, 이것이 저의 근본적인 무언가를 바꿔 놓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경향신문에 두 번째로 제출한 자기소개서를 오랜만에 들여다보는데, 헛웃음 나오는 경력(?)들이 잔뜩입니다. ‘블로그에 좋아하는 음악에 대한 글을 꾸준히 썼다’ ‘동물원을 찾아다니며 동물원의 의미에 대해 고찰했다’ ‘친구들과 소설을 쓰고 놀았다’. 심지어 이런 것도 있네요. ‘방탄소년단의 일본 인터뷰를 번역해 올리는 트위터 계정을 운영했다’.

소소해 보이는 스펙이 경향신문에서는 어이없게 치부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꼭 하고 싶었어요. 저는 어떤 일에서든 ‘전형성을 깨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바람직하지만은 않은 고집이 있는데 이런 신념이 경향신문에서는 통하기에 제가 합격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일평생 기자를 꿈꿔온 투철한 ‘기자 키드’가 아니어도, 머릿속이 저널리즘과 사회에 대한 고민으로 꽉 차 있지 않더라도, 나름의 ‘기자상’을 정립할 수만 있다면 된다고 생각해요. 거기에 자기 색깔을 입혀 발전시켜 나가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요?

최종 면접에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냐는 질문에, “저는 오늘 떨어지더라도 언젠가 경향신문의 기자가 될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덧없어 보이던 언론고시 4년 차, 경향신문은 제 유일한 확신이었습니다.

한창 경향신문 채용 페이지를 들락거리던 시절, 선배들이 쓴 ‘나의 경향신문 입사기’는 읽지 않았습니다. 저보다 먼저 경향신문에 들어가 일 년을 경험했을 생각을 하니 질투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에요. 이 글이 읽는 분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정말 좋겠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상관없을 것 같아요.

자신이 다니는 회사를 사랑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하는데, 지금도 저는 경향신문이 참 좋습니다. 입사를 꿈꾸던 시기의 막연한 동경과는 그 결이 많이 달라졌지만, 어쨌든요.
마지막 학기에 재학 중일 때부터 기자 시험을 준비했습니다. 운이 좋게 처음 지원한 회사에서 최종까지 가고, 그 뒤엔 ‘면탈’과 ‘최탈’이 이어졌습니다. 해가 바뀔 때까지 성과가 없자 많이 허탈했지만, 그래도 서류와 필기는 종종 붙는 편이니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했습니다. 하지만 연초부터 마가 끼었는지, 면접까지 가보지도 못하고 서류와 필기에서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경향신문 공채는 그렇게 ‘필기 3광탈’로 자기혐오가 극에 달해있을 때 찾아왔습니다. 당시 개인 블로그에 이렇게 썼습니다. “지금 경향이 떴는데 예전과 달리 나는 내가 경향에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렇게 진짜 못 가도 엄청 아쉬울 것 같진 않다. 경향도 또 떨어진다면 경향을 못 간 아쉬움보단 백수생활을 끝내지 못한 아쉬움과 불안함이 더 클 것 같은 느낌?”. 자소서와 면접에서 그렇게 경향신문 아니면 안 되는 것처럼 요란을 떨었는데, 사실 제 첫 마음은 이랬다는 걸 이제야 고백합니다. 평소 경향신문은 제가 제일 가고 싶은 회사 중 하나였습니다. 너무 간절하지만 지쳤기에 더 이상 상처받지 않으려고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제 ‘경향신문 입사기’는 좌절과 패배감으로 시작했습니다.

‘한 번만 더 속아보자’라는 마음으로 서류와 필기 전형을 준비했던 것 같습니다. 그동안 썼던 자소서들을 모으고 다듬어 3000자 자유 문항 글을 완성했습니다. 내가 얼마나 경향신문에 가고 싶은지, 경향신문은 왜 나를 뽑아야 하는지 정리하다 보니 첫 마음과 달리 꼭 붙고 싶은 마음이 커져서 꾹 누르기도 했습니다. 필기 전형의 상식 공부는 스팟 스터디를 꾸려 최근 몇 달 치 경향신문의 보도들과 키워드를 정리했습니다. 평소 스터디에서 사용하던 상식 책은 참고만 했습니다. 상식 난이도는 어려운 편이었는데, 지면에서 본 듯한 내용들이 많아 답안을 하나씩 채워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논술 주제는 ‘절차의 공정성과 결과의 공정성’, ‘중부담 중복지와 고부담 고복지’에 대한 내용이었고 저는 전자를 선택해 썼습니다. ‘공정’에 대한 논술 주제가 종종 나와서 많이 써봤던 내용이었는데도 개념이 어려워 주어진 80분 내내 끙끙댔습니다. 어떤 기준으로 필기 합격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형식의 완결성보다는 내용 고민을 많이 한 글이었습니다.

필기를 붙고 나니 마음이 벌렁벌렁거렸습니다. 아랑(언론사 취업스터디 온라인커뮤니티)에서 면접 대비 스팟 스터디를 꾸려 며칠 안 남은 시간 동안 매일 모여 모의면접과 토론을 준비했습니다. 감사하게도 그중 2명과 동기가 됐는데, 아직도 종로 일대를 지나갈 때면 창문도 없던 그 스터디룸의 탁한 공기를 함께 떠올리곤 합니다. 현장 취재를 하는 실무 전형은 경험이 없어 많이 걱정했는데, 미리 몇 가지 아이템을 생각해갔습니다. 주제로는 ‘코로나19 시대상’과 ‘청년 주거’가 나왔던 걸로 기억합니다. ‘코로나 확산으로 청년 공간이 부족해져 청년들이 스터디카페에 몰린다’는 내용을 취재했습니다. 참신하지 않은 내용이라고 생각해 최대한 다양한 현장을 가보려고 노력했습니다. 점심시간이라 통화가 안 되자, 직접 고용노동청을 찾아가기도 했습니다. 기사 작성 시간이 짧은 편이라 틈틈이 수첩에 기사 얼개를 정리해가며 다녔습니다.

두 번째 실무 면접에선 5명씩 들어가 찬반과 사회자를 나눠 토론하고, 이후 각각 한 명씩 면접을 봅니다. 토론 주제는 조마다 다른데 제 경우 ‘기본소득’이 나왔습니다. 저는 반대 입장을 맡아 평소 정리해놨던 내용을 떠올리며 의견을 개진했습니다. 사회자를 맡게 된다면 자기 의견을 어필하기 어려워 불리하다고도 생각할 수 있는데, 주제와 관련된 현황과 토론자들의 입장을 정리하며 원활히 토론을 이끌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면 되는 것 같습니다. 면접에선 ‘왜 경향신문이고 기자가 되고 싶은지’, ‘본인의 장점’, ‘기억에 남는 경향신문 콘텐츠’ 등에 대한 질문이 나왔습니다.

면접이 끝나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검정 구두 위로 벚꽃 잎이 나풀나풀 떨어졌습니다. 아름다운 봄날과, 마냥 아름답지만은 못한 제 마음이 겹쳐 설레면서 슬펐던 기억이 납니다. 최종 합격 전화가 오기 직전까지 하루에도 수십 번 나만 합격 전화를 못 받는 상상을 하곤 했습니다.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절망에 대한 ‘예행연습’을 참 많이도 했었던 것 같습니다. 합격 직후엔 그랬던 스스로가 마냥 안쓰럽기만 했습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보니 막을 수 없는 파도처럼 밀려오는 감정들을, 제 최선의 방법대로 건너 지나온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돌아가더라도, 과거의 저에게 그 불안을 애써 이기라고 조언해 주고 싶진 않습니다. 그저 정말 정말 수고 많았고, 언젠가는 그 예행연습이 필요 없어지는 시간이 너에게도 꼭 온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입사 전엔 ‘어떻게 해야 붙을지’에 대한 고민을 주로 했습니다. 사실 ‘어떤 기자가 되고 싶은지’, ‘어떤 기자가 돼야 할지’는 요즘 더 많이 생각하고 고민합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볼 때, 경향신문은 그런 고민을 맘껏 할 수 있는 곳인 것 같습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대상에 대해 며칠 꼬박 고민하고 취재한 기사를 1면에 실어주고, 취재원 보호와 보도 가치 중 어느 것이 우선일지 같이 고민해 주는 선배와 동기들이 있습니다. 앞으로도 고민을 계속 이어나가고 싶습니다. 겨우 1년 차 기자라 갈피를 못 잡고 허둥지둥할 때가 많습니다. 올해 벚꽃이 떨어지는 계절엔 저와 함께 ‘기자가 무엇인지’ 고민해 주실 분들을, 간절히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