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미리 만나보세요

미리보는 경향인 본문

  1. HOME
  2. 미리보는 경향人
  3. 기자 24시

기자 24시

기자는 기사로 말하는 존재이다.

기자는 사람을 만나 이야기만 듣는 것이 아니라 이를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게 풀어낸다.
과거와 다르게 독자는 종이신문이 만든 프레임을 벗어나 온라인 공간에서 더 자세한 이야기를 원한다.
기자들은 독자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지 더욱 고민하고, 그만큼 기자들의 24시간은 더 짧아졌다.

사회부 사건팀 허남설 기자의 24시

허남설 기자 업무 사진
AM 07:00 영등포경찰서 기자실 문을 연다.
먼저 나온 한 기자의 책상 위에 일간지 2~3개가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다. 어떤 기사가 있는지 유심히 살펴본 모양이다. 그중에 경향신문이 있다. 뿌듯하다. 매일같이는 아니더라도 독자들에게 주목받을 수 있는 기사, 그러면서도 의미 있는 기사, 경향신문만의 시각과 깊이를 담은 기사를 써야 하고, 또 쓰고 싶다. 기자의 일상이다.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매일 오전 9시까지 기삿거리를 발굴해 발제해야 한다. “아무것도 없네.” 보도가치가 떨어지는 단순 형사사건 하나조차 없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지난밤 취재원을 만나 술을 마셨지만 당장 쓸 기삿거리는 얻지 못했다. 더 깊이 취재하고 익혀서 기획기사로 키워야 한다. 기자실엔 키보드를 두드리고 마우스를 딸깍거리는 소리만 간혹 흐른다. 다행히 다른 신문과 방송에서도 딱히 눈에 띄는 보도가 없다. 동료이자 경쟁자들의 한숨소리를 들으면 잠시 위안이 된다. 그러나 기자의 평화가 독자에게는 좋은 일이 아니다. 이 평화를 깨고야 말리라는 다짐을 해 본다.
AM 09:00 보고시각이 점점 다가온다.
머리를 싸매던 중 오전 8시 50분, 다행히 서울 강서구 아파트 단지 경비원 집단해고를 취재하며 알게 된 취재원이 전화를 걸어왔다. 보고를 올렸다. 곧바로 캡(사건팀장)의 전화가 온다. 캡이 두 가지 지시를 내린다. 첫째 경찰이 낸 사건 보도자료를 취재해 기사로 작성해 온라인에 전송할 것, 둘째 오전 중 예정된 시민단체의 국회의사당 앞 기자회견장에 가볼 것. 일단 경찰 보도자료를 바탕으로 주요 관계자에게 사건을 취재한 후 온라인 기사를 전송했다. 지금은 신문사, 방송사, 통신사, 인터넷 언론사 등 모든 언론사가 '리얼타임'으로 경쟁하는 시대다. 속도와 함께 깊이도 중요하다. 함량미달 기사에는 비아냥과 항의가 잇따른다. 그래서 기사를 빨리 쓰면서도 꼼꼼하게 취재해 깊이있게 작성해야 한다. 2016년을 살아가는 기자의 현실이자 운명이다.
기사를 전송한 후 곧바로 노트북을 챙겨 여의도로 향했다. 기사는 팩트. 기자회견 현장을 사진으로 촬영하듯이 모든 것을 취재하는 것이 중요하다. 주관 단체의 정확한 이름, 참석자의 숫자, 주요 참석자 면면, 각종 스케치, 경찰 병력, 들고온 피켓과 플래카드의 크기와 적힌 구호….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다. 기자회견을 다녀온 뒤 주요 내용을 정리해 기자실에서 온라인 기사를 전송했다. 졸음이 밀려오지만 잠이 들 시간이 없다.
AM 11:45 다시 캡의 전화가 울린다.
“오늘 강서구 아파트 기사가 지면용으로 잡혔으니 오후 4시까지 10장으로 써 전송할 것. 의미있는 기사니 공을 들여라”. 기사의 방향과 넣어야 할 팩트들에 대해 캡과 간단히 상의한 후 전화를 끊는다. 점심도 취재의 연속이다. 오늘은 모 대학 고위 인사와의 식사 자리다. 여기서도 다시 술잔이 오간다. 몇잔을 들이부었지만 술에 취할 겨를이 없다. 머릿속에서 지면 기사의 개요를 그려본다. 동시에 고위 인사가 중요한 발언을 하는지 긴장을 늦출 수도 없다.
PM 01:30 시간이 빠듯하다.
강서구 아파트 현장으로 향했다. 기자회견을 보고, 삭발식을 취재하고, 주민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여러 당사자들의 입장을 듣는다. 근처 커피숍에 가서는 기사를 제 시간에 보낼 수 없을 것 같다. 아스팔트 위에서 노트북을 꺼내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손이 얼어 오타가 연발한다. 마감시간은 어길 수 없는 생명선과 같다. 손가락이 더욱 바빠진다.
PM 03:59 기사 전송 버튼을 눌렀다.
이게 끝이 아니다. 오후 4시 15분, 캡의 전화가 왔다. “기사에서 그 사람이 이렇게 주장하는데 논리적으로 잘 안 맞네. 이게 맞아? 다시 확인해봐.” 다시 취재원에게 전화를 걸어 최종 확인한 후 캡에게 보고했다.
PM 04:45 기사를 넘기기 전에 팩트를 최종 확인하는 과정이다.
이번엔 부장 전화다. 역시 끝은 아니다. 뉴스는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소비된다. 또다시 새로운 기삿거리를 찾아야 한다. 어디에 기사가 있을까. '최근 기사를 썼던 모 대학 강사 해고 문제, 모 대학 교수 해임 논란, 모 경찰서 사건 진행 사항' 등을 전화로 취재한다. “이야기해드릴 게 없습니다”, “그때 전화했을 때 더 이상 없다고 했잖아요”라는 다소 귀찮아하는 답변에 낙담할 때도 있다.
PM 06:00 휴대전화 스케줄을 본다.
오후 7시 30분부터 모 경찰 간부를 만나기로 돼 있다.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할지, 기삿거리가 있을지 가늠해 본다. 술자리, 밥자리, 각종 사람 만나는 자리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하루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경찰서의 사무실에서, 범죄 현장에서, 시민단체의 기자회견장에서, 집회시위 현장에서…. 점심시간과 저녁시간도 빠짐없이 챙겨 누군가를 만난다. 그렇게 이 세상을 사는 다양한 주체의 이야기를 한 마디라도 더 들어야만 그만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깊은 기자가 된다. 그러고 보면 거의 매일 새로운 사람과 밥을 먹고 술을 마시며 함께 시간을 보내는 건 그 자체로 꽤 흥미로운 일이다. 한 선배 기자는 “네가 만난 사람에 대해 좋다거나 혹은 나쁘다고 판단하지 마라”고 했다. 세상에 좋은 사람이나 나쁜 사람은 없고, 다만 이상한 사람들과 이상한 사건들이 있을 뿐. 그들이 왜 이상한지에 대해 판단하고 취재하는 게 기자의 일이다. 어쩌면 기자들은 이상한 사람을 만나면 본능적으로 쾌감을 느끼고 취재에 나서는 다소 변태적인 인간들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도 이상한 사람을 찾아 나선다. 기자는 ‘정직한 관찰자’일 뿐, ‘정의의 심판관’은 아니다.
기자는 기사로 말하는 존재다. 누군가를 만나 이야기만 주워들을 게 아니라 이를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게 풀어낸다. 이제 독자들은 더 이상 종이신문이 만든 프레임으로만 세상을 보지 않는다. 온라인 공간에서 그들은 더 자세한 이야기를 기자들이 해주길 바란다. ‘무엇’을 기사로 쓸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넘어 ‘어떻게’ 기사를 쓸 것인지를 두고 고민은 더욱 깊어진다. 그만큼 기자들의 24시간은 더 짧아졌다.
PM 11:30 집으로 향했다.
저녁 자리 경찰 간부로부터 들은 기삿거리가 머릿속을 맴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잊어버리기 전에 노트북을 꺼내 기록해둔다. 몸은 피곤하지만 가슴은 뛰고 있다.
나는 경향신문 사회부 기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