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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경향신문 입사기

나의 경향신문 입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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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평생 직업이 될 수 있을까’

언론사 입사를 준비하기 전 오랜 시간 되뇌어 봤던 질문입니다. 낯을 많이 가리는 대문자 ‘I’인데다 불확실성을 싫어하는 성격, 기자와는 퍽 맞지 않아 보였습니다. 그렇지만, 조잘조잘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저는 ‘말’과 ‘생각’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좋았습니다. 기자가 아니면 어느 직업이 일면식도 없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요즘 이런저런 일이 있어요.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말을 건넬 수 있을까요. 이 장점만 보고 우선 언론사 입사의 길에 뛰어들었습니다.

호기롭게 기자가 되겠노라 외쳤지만 걱정거리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정해진 준비 방법이 없다는 것이 불안했고, 치열하게 모아뒀던 돈도 점차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언제까지고 기자라는 목표를 붙잡을 순 없었습니다. 현실을 감안해 남은 돈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해 버틸 수 있는 ‘1년’을 준비 기간의 마지노선으로 잡았습니다. 그렇게 결심한 날, 머릿속 ‘데이터베이스’를 채워야겠단 마음에 무작정 경제지 한 곳과 종합지 한 곳을 구독했습니다. 하루 3~4시간씩 두 신문의 논조와 기사를 비교해가며 읽었습니다. 그 과정이 반복되다보니 뚜렷한 주관이 생겼습니다.

자연스레 경향신문에 대한 지원 동기도 명료해졌습니다. 다양한 분야 중 경제 기사에 관심이 많았는데, 답을 정해놓은 듯 쓰거나 논점을 획일화하려는 듯한 기사들이 싫었습니다. 예컨대 주 52시간 근무제가 경제 성장을 제약하는 악법이라는 주장을 보면 ‘공감 능력이 너무 부족하다’ 싶었거든요. 폭염 속에 주 40시간 에어컨 수리 보조 아르바이트를 할 때면 녹초가 돼 집에 돌아갔는데, 52시간이 부족하다니. 돈은 한 푼 더 벌더라도 사는게 사는 것이 아니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경향신문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독자로 봤던 경향신문은 경제를 논하더라도 ‘돈’이 아닌 ‘삶’에 초점을 뒀다고 느꼈거든요. 주장이 너무 과하지도, 현실과도 괴리되지 않았다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렇게 자소서에 경향신문처럼 독자의 공감을 이끄는 기사를 쓰겠다고 적었습니다. 부족하지만, 지금도 직접 주식 ·코인 투자를 하며 투자자의 관점에서 경제 기사를 쓰다 보니 입사 포부를 절반(?)쯤은 실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찌어찌 준비는 해나갔지만 관건은 결국 필기시험이었습니다. 미리 글을 써놓고 외우기엔 어떤 논제가 출제될지도 모르는 데다, 시간도 부족했습니다. 다른 방법을 썼습니다. 글을 쓰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대신 다양한 이슈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는 데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미리 논지와 논거만 생각해 놓는다면, 글이라는 틀에 맞춰서 옮기기만 하면 된다는 판단에서였습니다. 그동안 읽었던 사설과 칼럼을 떠올리며 현장에서 개요를 쓰고 원고지에 적어나갔습니다. 만약 자유주제라면 표현 하나하나 갈고닦은 하나의 완성된 글이 효과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이 방법을 시도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실무전형 역시 막막한 것은 매한가지였습니다. 주제를 예측하기 어려운 것은 동일하지만 필기시험과는 달리 참고할 ‘교본’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미 데스킹된 르포 기사야말로 기사의 관점과 형식을 배우기에 가장 적확하니까요. 낯을 가려 스팟 스터디가 불편하기도 해, 실무 시험 전까진 몇 년간의 경향신문 르포기사들을 훑어보며 홀로 준비했습니다.

지난해 르포 주제는 ‘상충된 것이 공존하는 현장’이었습니다. 5분 정도 고민한 끝에 광장시장으로 달려갔습니다. 핫플로 떠오른 광장시장을 찾는 외국인이 늘고 있지만, 정작 그 자리를 지켜온 상인들은 오히려 임대료 상승 등으로 달갑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야심 차게 달려갔지만 시간이 너무 일렀는지 문을 연 가게가 많지 않았습니다.

방황하다 보니 남은 시간은 두 시간, 이대로는 올해 백수 탈출은 글렀다 싶어 대안을 찾기 위해 곧바로 종로3가로 향했습니다. 마침 점심시간 즈음이었는데요, 무료 급식을 받기 위해 한여름 땡볕에 땀을 흘리며 줄을 서는 어르신들과 인근 관광지인 익선동에 웨이팅이 가득한 식당의 모습이 눈에 띄었습니다. 청년과 노인 모두 저마다의 핫플인 종로3가를 찾은 이방인이지만, 청년과 달리 노인들은 더위 쉼터에서도 사회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불청객’이라는 주제로 르포를 썼습니다. 안되는 것을 붙잡기보단 빠르게 다른 주제를 찾은 판단이 유효했던 셈입니다.

면접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워낙 긴장을 많이 해 청심환을 털어먹고 ‘면접? 별 거 아니다’라는 마인드 컨트롤까지 만반의 준비를 다했지만, 몸속에 각인된 긴장 DNA 탓인지 받은 질문을 기억 못 할 정도로 머리가 하얘졌거든요. 면접관으로 오셨던 선배께서 ‘너무 떨어서 안쓰러울 정도’라고 기억하실 정도니 얼마나 긴장했으면 그랬나 싶습니다. 이런 성격을 아는지라, 질문을 미리 외운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생각했습니다. 대신 솔직하기로 했습니다. 인재상에 끼워 맞추기보단 소신대로 답하려 했습니다. 경향신문이라면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떨어뜨릴 만큼 편협하진 않을 것이라 생각했거든요.

그렇게 최종면접까지 마친 뒤 여느 날처럼 도서관에서 신문을 읽던 중 채용 전화를 받고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호들갑을 떨었던 게 기억이 납니다. 다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결국 운이 따르지 않았나 싶습니다. 만약 생소한 주제가 나왔다면 과연 붙었을까. 장담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당장 필기시험에서 떨어질 줄 알고 논술 강의를 찾아볼 만큼 스스로도 확신이 없었거든요. 그러므로 당장 성과가 좋지 않다고 위축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 걸음씩 차근차근 준비하다 보면, 좋은 결과가 따르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지난해 7월 임원 면접을 마친 후, 어색한 구두를 신은 채 정동길을 걸어가며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눈물의 의미가 두 달 간의 전형을 마쳤다는 후련함 때문인지, 더 잘하지 못했다는 아쉬움 때문이었는지는 흐릿합니다. 실컷 울고 나니 떨어진 후에 다시 경향신문을 지원할 각오까지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불합격을 상상하며 미리 상처받을 준비를 하던 중에 합격했습니다. ‘고시’라고 불리는 무시무시한 언론사 시험의 준비생 중 본인에게 확신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합격 전화를 받기 전까지의 저처럼요) 불안한 마음을 안고 이 페이지를 보고 있으시다면, 불안하고 확신이 없는 때에 합격이 찾아오기도 하더라는 말씀을 먼저 드리고 싶습니다.

2년 가까이 기자 시험을 준비했습니다. 막바지에는 슬쩍 찔러보지 않은 언론사가 없어 친구들에게 “떨어진 회사의 뉴스를 보지 않는다면 뉴스 없는 세상에 살게 될 것”이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 정도로 수많은 전형에서 탈락하면서 나의 공부법이 잘못된 것인지, 내가 가진 경험들이 부족한 것인지 계속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수험생의 종지부를 찍을 때까지 저 스스로의 무언가를 크게 바꾸지는 못했습니다. 자신을 억지로 바꾸기보다, 내가 가진 역량이 회사와 나의 ‘기자상’과 어떻게 닿을 수 있는지 연결해 보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자기소개서에서도 ‘솔직함’이 기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뻔한 수식어지만 저를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로 ‘성실함’을 꼽았습니다. 호텔 하우스키핑 아르바이트, 밤새워 공부해 받았던 성적장학금 같은 재미없는 이력도 느낀 점을 담으니 경험이 됐습니다. 꾸며내는 것보다는 본인을 그대로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자소서는 면접 등 다음 고차 전형까지 쓰인다는 생각으로, 수식어구를 덜어내고 실제로 한 경험들을 채워 넣으려 했습니다.

필기 시험의 처음과 끝은 ‘신문’이었습니다. 저는 몇 년간 경향신문 지면을 매일 읽었습니다. 기사와 칼럼에 색연필로 줄을 치고 중요한 내용들은 노트에 옮겨 적는 아날로그식(?) 공부를 했습니다. 평소 이렇게 공부를 하며 상식 공부와 논술 글감 정리를 따로 하지 않았습니다. 상식과 논술 등 필기 전형은 지면을 꼼꼼히 본 덕에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논술에서는 식자의 인용구를 넣거나 학술적 개념을 쓰기보다는, 논제가 묻는 것에 충실히 답하는 한 편의 글을 쓰려고 노력했습니다.

실무 전형 중 가장 긴장되는 것은 르포 전형이었습니다. 제한된 시간과 현장의 불확실성이 가장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어떤 주제로 기사를 쓰던 완성은 한다”는 마음으로 현장에 뛰어들었습니다. 취재가 잘 안되면 묘사라도 풍부하게 쓰자는 생각으로 취재 노트를 채웠습니다. 최종 면접에서는 ‘왜 기자가 되고 싶냐’ ‘기자가 된 후 어떤 기사를 쓰고 싶냐’ 등 자신이 세운 기자상에 관해 묻는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아주 기본적인 질문이지만, 기자로서의 직업관 을 잘 정립해두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언론사는 사람이 전부다”라는 말이 있는데요. 그렇다면 경향신문은 ‘좋은 동료들’이 있으니 ‘전부 좋은 곳’이라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기사를 쓰면서 드는 사소한 걱정들부터 기자로서 성장하는 과정에 필요한 고민들을 같이 털어놓을 수 있는 선배와 동기들이 늘 곁에 있어 든든한 곳입니다. 곧 회사에서 만나 이런 고민들을 나누고 함께 성장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취업준비생 시절 많은 자기소개서를 쓰면서 물음별 저의 강점을 드러낼 답변을 나름대로 철저히 준비해왔었습니다. 그러나 경향신문 채용 홈페이지에 접속한 후 서류 전형을 처음 확인했을 땐 처음 보는 자유 형식의 자기소개서에 적잖이 당황했습니다.

물론 서류 전형에 일관성 있게 적용할 나름의 원칙은 있었습니다. 서류 전형은 입사 전형의 첫 단계인 만큼 다른 지원자와 차별화할 수 있는 저만의 강점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만의 강점을 드러내려고 하다 보면 ‘제가 하고 싶은 말’만 늘어놓게 될 것 같아 그것을 경계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그간 작성했던 자기소개서 질문 문항을 취합하고 요약하여 나름의 항목을 만들어 "채용담당자가 궁금해할 내 이야기"와 "내가 자랑하고 싶은 내 이야기"를 자기소개서에 채워넣었습니다.

서류 전형에 합격했다는 결과를 확인했을 땐 설렌다기보다 오히려 덤덤했습니다. 필기 전형은 제가 오랜 기간 공부해온 것들을 바탕으로 치르는 시험이므로 조바심내서 단기간에 ‘벼락치기’로 대비하는 것은 당락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대신 필기 전형을 준비하는 동안 기자 직군, 경영 직군 가리지 않고 언론사 필기시험 합격 수기를 찾아보며 기출 문제를 토대로 문제 유형에 대해 파악하려 했습니다. 그러자 곧 ‘모두가 어려워할 문제’라든가 ‘모두가 맞출 수 있는 문제’ 등 문제별 난이도가 구분됐고, 시험장에 있는 경쟁자가 어려워할 시사 상식 문제를 맞춰야겠다는 생각으로 평소에도 정독하던 경향신문 기사를 더욱 꼼꼼히 읽으며 필기시험을 대비했습니다.

실무 면접과 최종 면접을 준비하면서 든 생각은 다시 서류 전형을 준비하던 때로 돌아간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면접관이 몇 명인지, 면접관과 나의 거리는 적당할지, 앉을 의자는 팔 걸이가 있을지 없을지 면접 상황을 이미지 트레이닝 해보려 해도 도무지 그려지지 않았지만, 면접관께서 서류 전형 시 제출한 자기소개서를 바탕으로 저에게 질문할 것이라는 게 확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 자기소개서를 인쇄한 후 ‘남의 자기소개서를 보듯’ 훑어봤습니다.

신기하게도 컴퓨터 화면으로 보던 제 자기소개서를 A4용지로 인쇄해서 읽어보자 마치 남의 자기소개서를 보는 것처럼 느껴졌고, 그 자기소개서에는 질문거리가 꽤 많아 보였습니다. 전공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지, 복수 전공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지 등 예상 면접 질문을 뽑아 답변을 정리해나갔고, 가지치기하듯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스스로 던졌습니다.

이내 완성된 면접 예상 질문과 답변을 대본처럼 갖고 다니며 틈만 나면 허공에 대고 답변을 외웠고, 지하철에서, 버스에서도 유튜브로 실전 면접 영상을 틀어놓고 머릿속에 답변을 되뇌면서 면접 전형을 준비했습니다.

최종 합격 후에는 입사 전형 일련의 과정들이 하나하나 순서대로 떠오르며 학창시절부터 취업준비생까지 공부하며 준비했던 것들이 입사 전형 순간순간의 장면들과 매칭되며 ‘다행히 무엇하나도 허투루 쓰이진 않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향신문에 입사하려는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모두 제각기 다른 경험으로 완성된 각각의 서사이므로 모두가 저마다의 강점을 가지고 있으니 누군가와 비교하지 않고 자신감있게 합격에 도전했으면 좋겠습니다.
서류전형 마감 전날, 행여나 오탈자가 있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자기소개서를 꼼꼼히 확인했습니다. 어색한 문장을 붙들고 이리저리 바꿔봤습니다. 수정을 마치고 시계를 보니 날이 바뀌어 새벽 3시였습니다. 머리가 후끈했습니다. 뻑뻑한 눈을 비비면서 ‘이만하면 괜찮은 것 같은데’라며 자신을 다독였습니다.

처음에는 3000자 분량의 백지를 어떻게 채워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억지로 경험을 쥐어짜 쓰려고 하니 글이 중구난방으로 흩어졌습니다. 결국 나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경험에 집중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기자가 되기로 결심한 극적인 계기나, 내세울 만한 뚜렷한 사명감은 없었습니다. 대신 ‘뭔가를 쓰는 직업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은 선명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글’과 관련된 경험을 찾아 엮어나갔습니다. 추상적인 말이 아니라 구체적인 경험을 녹여내려고 했습니다. 초등학생 때 읽었던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와 대학생 때 읽은 김훈의 ‘자전거 여행’에 대해 썼습니다. 지역에서 생활하며 바라본 5일장 풍경과 아이들이 개울가에 물장구치는 모습을 자기소개서에 담았습니다. 과장하지 않고 솔직담백하게 쓰려고 했습니다.

필기시험은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마음가짐으로 준비했습니다. 낯선 논제를 100분 남짓한 시간 동안 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습니다. 논술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어놓기로 했습니다. 평소 스터디를 하면서 매주 두 편의 글을 쌓아나갔습니다. 글이 20편 정도 쌓이자 자신감이 붙었습니다. 시험장에서는 ‘일론 머스크의 트위터 인수와 미디어 자본’ ‘너에게 가는 속도 493km 표기의 적절성’ 두 논제가 나왔습니다. 생소한 논제였던 터라 처음에는 당황했습니다. 지금까지 써왔던 글 3~4개에서 논리와 사례를 뽑아내고 즉석에서 떠올린 생각을 버무려 글을 완성했습니다. 데이터베이스의 역할이 절대적이었습니다.

실무전형에 포함된 르포 기사작성은 불확실성이 높은 관문이었습니다. 어떤 주제가 나올지 예측도 어렵고, 방향을 잡아도 취재가 잘 되리란 보장이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나온 소재를 쭉 훑어봤습니다. 같이 시험을 준비한 동료에게 조언을 구한 것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시험장에서는 ‘코로나19 이후의 일상’이라는 주제가 나왔습니다. 코로나로 노인정이 제대로 운영되지 않고 있다는 내용을 썼습니다. 취재원의 의심스러운 눈초리에 굴하지 않고 용감하게 말을 걸다보니 쓸 수 있는 멘트들이 조금씩 모였습니다. 정해진 취재 마감 시간보다 30분쯤 미리 들어와서 취재 내용을 정리한 것이 유효했습니다.

면접 때는 ‘긍정적 자기암시’가 효과적이었습니다. 7~8명의 면접위원이 내 답변을 평가한다고 생각하면 어깨가 무거워졌습니다. 주눅 든 모습으로는 좋은 인상을 주기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평소 긴장을 많이 하는 터라 대책이 필요했습니다. 틈틈이 ‘면접은 나에 대해 궁금한 게 많은 사람들에게 나를 알려주는 자리’라고 자기암시를 걸었습니다. 좋은 인상을 줬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은 한결 편했습니다. 실무전형을 마치고 나서는 기분이 좋았습니다. 입사한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기도 했습니다.

최종면접에서 부풀었던 기대가 가라앉았습니다. 자기소개서에 적은 사실관계를 지적받았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머뭇거리다 엉뚱한 답변을 내놓았습니다. 면접을 마치고 왜 그렇게밖에 답변하지 못했을까 속이 상해 지인을 붙잡고 하소연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어떤 점 덕분에 합격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자기소개서가 일정 부분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봅니다. 논술, 르포 기사는 ‘나’에 관한 글은 아닙니다. 자기소개서는 내가 누구인지 알려줄 수 있습니다. 자기소개서 말미에 “경향신문에서 더 넓은 현장을 누비며 타인에게 뻗어 나가는 글을 쓰기를 희망한다”고 적었습니다. 이 말을 지키고 있는지 되돌아보면 좀 민망하기는 하지만 당시에는 제 나름대로 솔직한 심정을 적었습니다. 지원자분들도 자기소개서를 ‘나’를 주제로 한 글쓰기 시험이라고 생각하고 삶의 경험을 솔직하게 풀어내신다면 좋은 결과 얻으실 거라 믿습니다.
정해진 준비 방법이 없어서 참 어려웠습니다. ‘붙을까?’ 싶으면 떨어지고 ‘떨어지겠다’ 했는데 붙기도 했습니다. 정말 다행히도 경향신문이 후자였습니다. 제 이야기는 그냥 어떤 이는 이렇게 준비했다더라 정도로만 참고해주세요.

서류에선 기자 직무 역량을 어떻게 보여줄지 막막했습니다. 학창 시절 기자가 꿈이라고 얘기했고 대학방송국에도 몸 담았지만 그뿐이었습니다. 공모전 참여 경험이나 인턴기자 경험이 없어서 제대로 된 기사를 써본 일이 없었습니다.

갖고 있지 않은 실전 경험 대신 실무 경험이라고 여겨질 만한 다른 것들을 내세웠습니다. 기자는 결국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보고 듣는 게 일 아닐까요. 그래서 세상에 넓은 관심 두고 살아왔다는 걸 보여줄 수 있는 내용으로 3000자를 채웠습니다. 예컨대 ‘교환학생 시절 버스 창밖으로 인종차별을 목격했다. 이걸 계기로 도시 기저에 어떤 차별이 있단 걸 배웠다’ 하는 식이었습니다. 관찰만 했을 뿐 기사를 썼던 건 아닙니다. 다만 그러한 관찰 경험이 기자로 일하는 데 밑거름이 되지 않겠냐는 생각이었습니다. 성과가 아닌 경험도 충분히 자신의 역량과 관심사를 소개하는 데 쓰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언론사 필기 시험의 첫 합격을 맛보기까지 짧지 않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합격 전과 후를 가른 가장 큰 차이는 ‘논술 개요를 열심히 짰는가’였습니다. 개요 없이 글을 쓰면 1500자 글이 용두사미로 끝나버리거나 처음에 쓰려던 것과 결론이 달라지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경향신문 논술 시험에서도 20분은 개요 짜는 데 할애했습니다. 논제가 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내가 하려는 답은 무엇인지, 답 안에 논제가 요구하는 모든 요소가 다 포함돼있는지 정리한 뒤에서야 원고지에 쓰기 시작했습니다. 종이를 받자마자 글을 쓰기 시작하는 주변 소리에 조급해지는 마음을 다잡아야 했습니다.

개요는 실무 시험에서도 큰 도움이 됐습니다. 르포 기사 작성 시 주제를 받자마자 현장으로 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또다시 조급해지곤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 불안을 이겨내고 고사장에서 어느 정도 주제를 잡고 나가는 게 길바닥에서 덜 헤매는 지름길이었습니다.

지난해 경향신문 실무 시험 르포 주제는 ‘코로나19 시대상’이었습니다. 전년도와 같은 주제가 나올 줄 몰랐던 탓에 크게 당황했습니다. 개요를 짜고 나가긴 했지만 기사 방향을 잡기가 쉽진 않았습니다. 큰일 날 뻔 한 이야기인데, 솔직히 중간에 포기할까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어찌어찌 완성은 해서 냈습니다. 하려는 말은 아무리 못 쓴 것 같더라도 완성은 해야 한다는 겁니다. 사람 일이 어찌 될지 정말 모릅니다.

실무면접과 최종면접 모두 서류를 기반으로 진행됐습니다. 얼마나 진정성 있게 기자가 되고자 하는지를 드러내는 것이 핵심이라고 느꼈습니다. 가장 답하기 어려웠고, 기억에 남는 질문은 “기자가 사회적으로 ‘기레기’라고 욕먹는 시대에 왜 기자가 되고자 하는가”였습니다. 면접 뿐 아니라 면접 그 이후를 위해서라도 진솔하게 고민해야 하는 질문 같습니다. 이제 막 현장을 다니고 있는 요즘. 위 질문에 다시 답해야 한다면 어떻게 말할까 상상해봅니다. 몇 안 되지만 기사를 쓰며 1년 전 제가 했던 답에 확신을 더할 수 있을 때 큰 보람을 느낍니다.

시험을 준비할 땐 저의 부족한 점만 부각돼 보였습니다.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에 자신감이 한없이 떨어질 때가 많았습니다. 그럴수록 필요했던 게 내 강점을 스스로 믿어주는 것이었습니다. 내게 없는 것으로 막막해하기 보다 내가 잘하는 부분에 집중하며 자신감을 채워나가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할 것 같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마음 건강 챙기며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기자를 준비하면서도 편집기자가 뭔지, 무슨 일을 하는지는 잘 모르는 사람이 많은 걸 알고 있습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편집기자를 소개하는 가장 흔한 표현은 ‘최초의 독자이자 최후의 기자’입니다. 기사에 제목을 붙이고, 내용을 잘라내고, 사진을 고르고, 지면 레이아웃을 짜는 일을 합니다. 경향신문 공고가 나던 날, 저는 다른 언론사에서 인턴 편집기자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1년 정도 취재기자로 시험을 보러 다니던 중, 그냥 재미있어 보인다는 이유로 지원했었죠. 그렇게 보낸 반년은 편집을 사랑하게 되기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원고지 십수 매의 기사를 한 단어에 온전히 실어내기 위해 수없이 표현을 정제하고 응축하는 과정도, 매일매일 칼날 끝을 걷는 것 같은 강판 시간도 마냥 좋았습니다.

코로나19 거리 두기가 엄격하던 시절 수험 생활을 시작하고 끝냈습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무던한 성격의 소유자인데도 스트레스성 이명이 생기고 무기력해지더군요. 그럴 땐 ‘언젠가 되겠지’라는 다소 나이브한 생각으로 되도록 스스로를 다그치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아요. 논작은 1년 반 동안 스터디로만 대비했습니다. 전문적인 조언을 못 받는 대신 충분히 써보자는 생각으로 수요일과 토요일마다 논술과 작문을 각각 하나씩 쓰고 다음 날 퇴고하는 스터디 모임을 운영했어요.

고민 없이 편집기자로 지원한 만큼 자기소개서와 필기시험에서 가장 공들인 것은 제목이었습니다. ‘나 같아도 궁금해서 한 번 더 보겠다’ 싶게 쓰겠다는 마음가짐이었다고 기억해요. 실무 시험 주제는 ‘코로나19로 변화한 사회상’이었습니다. 현금이 사라지고 비대면 거래가 늘어나서 어르신들이 불편을 겪는단 걸 주제로 삼았습니다. 베테랑 언시생처럼 평소 구상하던 기사를 쓴 건 아니었어요. 평일 낮 시간에 은행, 시장, 버스, 약국, 음식점들을 돌아다니다 보니 어르신들 얘기를 많이 듣게 돼 야마로 삼았습니다. 사진도 직접 세 장을 찍어 첨부해야 했는데, 약국 앞에서 현금을 손에 쥐고 기다리는 할머니 모습이 마침 휴대폰 카메라 앵글에 걸려주어 고마웠습니다.

실무면접은 주로 편집에 가진 애정을 증명하는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좋았던 제목과 뿌듯했던 순간들, 어떤 점 때문에 편집기자가 되고 싶다고 느꼈는지를 얘기했어요. 마지막으로 하고싶은 말로는 ‘경향은 왜 7단 편집을 고수하는지, 6단 면과 7단 면을 나눈 기준은 무엇인지’를 역으로 질문했습니다. 편집기자는 주로 경력직으로 충원돼서 면접을 보는 것도 쉽게 오는 기회가 아니란 걸 알았기 때문에 떨어지더라도 궁금증은 풀고 가자고 생각했어요. 최종 면접에서도 특별히 경향이어야만 하는 이유를 강조하지는 않았습니다. 막연히 일하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은 많았지만, 다른 많은 지원자들처럼 경향을 읽으며 꿈을 키웠다거나 재수도 불사할 정도는 아니었거든요. 거짓말을 하면 티가 나는 성격이라 되도록 솔직하게 답변했습니다.

덤덤한 척 채용 과정을 돌아봤지만, 사실은 실수투성이에 엉망진창이었습니다. 최종까지 가본 적도 많지 않고 인턴과 병행하는 건 처음이어서 모든 걸음이 첫걸음 같았어요. 지원서에는 경력란을 빠트렸고, 필기는 복기도 못 할 만큼 급하게 쓴 데다가 실무 시험 날에는 지각까지 했습니다. 시험 도중엔 시장에서 지갑을 잃어버려 면접비를 차비로 탕진하기도 했어요. 최종 면접 이틀 전에는 전국 편집기자 체육대회에 억지로 끌려 나가서 경향 깃발을 든 선배들을 먼발치에서 보며 떨었던 기억도 납니다. 그날 얻은 근육통으로 며칠을 끙끙 앓다가 면접이 끝난 뒤에야 근처 카페에서 기절하듯 잠들었더랬죠. 합격운이 꼭 모든 조건이 완벽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찾아오는 건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습니다.

1년은 경향신문을 제 마음대로 해석하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지만 한 가지는 확실한 것 같아요. ‘경향은 이런 사람을 원할 것이다’를 추측해서 그 이미지에 맞게 본인을 끼워 맞춰 포장하거나, 전형적인 기자다움을 강조하려고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 ‘사람이 이렇게까지 다를 수 있구나’ 싶은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그럼에도 큰 틀에서 공통점이 있다면, 경향은 ‘모두 좋은 사람들 뿐이니, 어쩌면 나도 이들만큼 좋은 사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곳입니다. 제 착각을 공고히 해줄 또 한 명의 ‘좋은 사람’으로 만났으면 좋겠습니다.